겨울여행의 주제는 한적함이다. 봄의 생동감. 여름의 활력. 가을의 화려함과는 다른 분위기다. 산과 들은 을씨년스럽고. 길 위에는 말라비틀어진 낙엽만이 바람 따라 이리저리 뒹굴 뿐이다. 볼거리가 없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고 마냥 아랫목에 앉아 겨울이 떠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집을 나서보자. 황량함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겨울의 존재 의미를 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겨울을 기다려 산행을 떠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경남 양산과 밀양이 인접한 고장은 다른 계절도 좋지만 겨울산행에 잘 어울린다.
경상남도 밀양 재약산 수미봉에서 표충사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계곡에는 가을의 화려했던 단풍들도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아있다.
계곡엔 낙엽이 흘러 층층폭포로 떨어지고, 그 떨어진 낙엽은 다시 홍룡폭포로 떨어진다. 떨어지는 낙엽은 산 전체를 포근히 감싸고 있다.
가을을 날리는 억새의 물결은 이미 지난 8월말부터 영축산-신불산-간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따라 배냇고개를 넘고, 능동산을 지나 제약산 사자봉을 넘어 사자평원에서 절정을 맞고 있다.
11월 22일(토) 새벽 7시, 산을 좋아하는 '태극산악'팀 42명이 '영남의 알프스' 등반을 위하여 구미에서 경남 밀양의 재약산으로 출발하였다.
유럽의 알프스 산에 버금간다는 '영남의 알프스'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과 경남 밀양시 산내면, 경북 청도군 운문면 등 3개 시도에 모여 있는 가지산(1240m), 운문산(1188m), 재약산(1189m) 신불산(1208m) 영취산(1059m), 고헌산(1032m), 간월산(1083m) 등 해발 1천m 이상의 7개 산들을 지칭한다.
재약산은 재약산, 천황산, 수미봉,사자봉 등으로 혼동되어 불려지고 있다. 지형도나 대부분의 등산지도에는 재약산(1018m)과 천황산(1189m)이 따로 표기되어 있다. 재약산은 주봉이 수미봉(1018m)이고 천황산은 주봉이 사자봉이다.
천황산이 일제 때 붙여진 이름이라 하여 우리 이름 되찾기 일환으로 천황산 사자봉을 재약산을 주봉으로 부르면서 혼동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의 산하'에서는 천황산을 재약산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산꾼들은 대부분 제약산을 재약산 수미봉, 천황산은 재약산 사자봉으로 부르고 있다.
재약산 등반은 밀양 얼음골 계곡에서 약 2시간 정도 오르는 길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요즈음은 석남사로 넘어가는 도로에 뚫린 석남터널(800m정도)이나 배냇고개(900m정도)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오르는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다.
사자봉에서 수미봉에 사이를 사자평원이라고 부른다. 이곳 125만평에 이르는 재약산 동쪽의 사자평원은 두 봉우리 사이의 해발 800m 지점부터 완만한 타원형의 언덕들로 이어진 분지이다. 이 광활한 분지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억새벌판이다. 억새풀이 밀집해 자라는 곳만도 5만평에 이른다.
하지만 잔뜩 기대를 가지고 달려갔던 사자평원의 억새는 실망만 가져다주었다. 주위에 잡목이 많고, 소나무들이 군데군데 자라고 있었다. 무리져 핀 억새의 물결은 아직도 출렁거렸으나 계절이 지난 탓에 명성만큼은 아닌 것 같았다.
수미봉은 기암괴석들이 어우러져 억새의 평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미봉을 오르는 길엔 기암괴석들이 어우러져 억새의 평원과는 또 다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수미봉 바위 위에 '재약산'이라는 표지석이 우뚝 서 있었다. '재약산(載藥山)'이라는 이름도 산세가 부드러운 편이나 '재악산(載嶽山)'이라고 고쳐야 된다는 논란이 있는가 보다.
그러나 수미봉에서 고사리분교터를 지나 표충사로 내려가는 아름다운 능선과 평원은 산행에 지친 발걸음을 가볍게 하기에 충분하다.
신라 진덕여왕 때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표충사에서 치는 종소리가 온 계곡에 울려 퍼졌다.
밀양댐을 지나 단장면 범도보건소 앞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표충사로 가는 길이다. 5㎞ 남짓의 길 양편은 벚나무가 빼곡히 심어져 있는데. 앙상한 가지만이 잊혀져가는 가을을 아쉬워하고 있다.
재약산의 품 안에 조용히 들어선 표충사는 1300년이 넘는 유서 깊은 사찰답게 초입부터 심상치 않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1㎞에 이르는 길 양편을 가득 메워 고적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또한 절집 주변도 초겨울 운치가 그윽하다. 차를 이용하면 일주문을 지나 절 바로 앞 주차장까지 갈 수 있다. 여름날 무성했던 잎은 모두 떨어져 발아래 푹신한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 하다.
주변 지역의 전설이나 불교 경전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 대신 밀양 제약산(1108m) 자락에 자리한 표충사의 작명 사연은 조금 다르다. 불교와 유교의 이념이 혼합돼 있기 때문이다. 신라 무열왕 원년(654년) 원효대사가 죽림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했고. 흥덕왕 4년(829년) 영정사로 이름을 고쳤다. 임진왜란으로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년) 혜징화상이 중건했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헌종 5년(1839년) 사명대사의 8대 법손 천유선사가 임진왜란 때 구국을 위해 헌신한 사명·청허·기허 대사 등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면서 부르기 시작했는데 불교 탄압이 심했던 조선시대 유교 이념의 한 축인 충성을 강조한다. 표충사에는 국보와 보물 등 다양한 문화재가 소장되어있어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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